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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어쩌구/독후감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를 읽고...

by annmunju 2021. 7. 26.

* 아파르트헤이트 :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을 말한다.

 

아들이 '구 밑바닥 중학교'를 가기로 결심했고, 반대하는 배우자의 말"첫 번째 이유는 그 학교가 백인 투성이라서 ... 두 번째 이유는 가톨릭 중학교가 보통 학교보다 성적이 좋으니까 ... 우리 같은 노동자 계급이 좀처럼 누릴 수 없는 특권을 그렇게 간단히 버리다니, 계급 상승을 하기는 커녕 스스로 굳이 내려가려는 것 같아서 나는 싫다."

 

아들의 방을 청소하다 중요한 숙제를 발견했던 장면블루라는 단어는 어떤 감정을 뜻하는가? 이 문제에 아들이 잘못된 답을 적은 것이었다."나는 분노라고 적었는데, " ... 불현듯 노트 오른쪽 위에 아들이 낙서를 한 게 보였다.파란 펜으로 쓴 글씨는 마치 노트 구석에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는듯했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고작 중학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는 깊은 고민을 했었던가 싶다가도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책 제목을 보았을 때는 감성 있는 소설책인가 싶었다. 이 문장을 마주쳤을 때, 심장이 아래로 내려온 것 마냥 답답했다. 표정도 굳어졌다. 이 때 쓴 블루가 분노인가, 울적함인가. 어떤 의미로든 마음이 불편하다.

 


아들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백인 아빠가 아닌 동양인 엄마와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아이의 내면에는 '백인'과 '비백인'이라는 두 부분이 따로 존재하며, 그 두 부분이 언제나 하나로 융합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

"아직도 60년대 스타일로 흑인을 정글이니 바나나니 하면서 차별하는 건 동유럽 출신 촌놈들뿐이야."

이쪽은 이쪽대로 다른 계층을 향한 차별 발언을 입에 담았다. 

 

내가 아이여도 백인 아버지보다 동양인 어머니에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한 집단에서 소수자가 된다면 같은 소수자끼리 더 뭉치려는 경향을 보인다. 뭉치면 집단이 되고 이 집단은 개인보다 의견을 피력하기 쉬워진다. 한 사람이면 듣도 보도 않던 얘기를 여러 사람이 같은 목소리를 내면 주목받을 수 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같이 교류하고 있는 문화가 다를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확증 편향으로 또 다른 차별 발언을 한 저자의 배우자의 말을 보고 마음에 응어리가 졌다. 아이는 이와 비슷한 더 많은 상황을 접했을 것이다. 

 

* 차브 : 무례하고 상스러운 언동이 특징인 하층 계급의 젊은이(옥스퍼드 영어사전) / 공영단지 같은 곳에 거주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을 통칭하는 말로 쓰임.

 

지식인들은 문제의 용어를 쓰지 않으려 하는데, 정치적 올바름을 기준으로 폭탄 다루듯 조심스럽게 단어를 회피한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근원은 현실적인 빈곤에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도둑질하는 팀을 목격한 동급생들이 그를 매도하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러면 안 돼."라며 정의의 사도답게 타이르던 아이들은 어느새 '범죄자'를 대하는 법의 파수꾼처럼 팀을 내려다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가난뱅이"라든지 "공영단지에 사는 사람들은 사회의 쓰레기"라고 너나없이 말하며 팀을 둘러싸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자신만의 정의라고 집단으로 믿어버리면, 인간은 미쳐버리거든."

 

소수자들이 뭉친다고 모두 올바른 이야기만 하는 것인가? PC 주의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정치적 올바름. 편견이 섞여있는 언어적 사용을 하지 말자는 사회 운동의 일종이라고 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말은 어떠한 특정 집단(특히 힘이 약한)도 공격받거나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보면 훌륭한 사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사회적 약자가 양보나 배려 받는 게 아닌 오히려 갑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PC 논리는 언어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주장(Sapir-Whorf 가설)에서 나온 것이다. 결정한다는 표현 자체가 비약으로 보인다. 우리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언어로 규정되지 않은것)을 보고 인식할 수 있다. 언어가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언어 자체가 사고방식을 결정짓는다고 이야기 하기에는 과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모든 사고는 옳을 수도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옳음의 기준도 개인마다 다르다. 집단화 되고 성역화 되었다고 옳지 않은 것이 옳게 될 수도 없고, 옳은 것이 옳지 않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로 정의된 것에 집착해 실체를 놓치면 안될 것이다.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바르게 보는 연습을 해야한다.

 


시티즌십 에듀케이션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이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식, 기술, 이해 등을 제공한다. 특히 시티즌십 에듀케이션은 민주주의와 정부, 법의 제정과 준수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과 이해를 증진해야만 한다." 그와 더불어 "학생들이 정치나 사회의 문제를 비평적으로 탐구하여 마련한 근거를 바탕으로 타당한 주장을 펼치면서 논쟁할 수 있도록 수업에서 그와 관련한 기술과 지식을 가르쳐야한다." 라고도 쓰여 있었다. 

 

"기말시험의 첫 번째 문제는 '엠퍼시 empathy 란 무엇인가?' 였어. 그다음은 '아동의 권리를 세 가지 적으시오.'였고. 전부 쉬운 문제들이라 누워서 떡먹기처럼 백점 받았어" 

자신만만해 하는 아들 옆에서 배우자가 말했다.

"그거 엄청 심오하고 어렵지 않냐? 너는 뭐라고 답했는데?"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try to put yourself in their shoes)

 

곧잘 엠퍼시와 혼동되는 단어가 심퍼시 sympathy다.

 

* sympathy :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 어떤 사상,이념,조직 등에 대해 지지하거나 동의하는 행위.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나 이해. (감정적 상태)

* empathy : 타인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 자신이 타인의 입장이었다면 어떨지 상상함으로써 누군가의 감정이나 경험을 함께 나누는 능력. (지적 작업)

 

... 기쁜 듯이 웃는 아들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엠퍼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선의가 엠퍼시와 연결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감정적인 심퍼시가 선의와 관련 있을 것 같지만, 의견이나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공감하는 데에는 굳이 선의가 필요 없다.

인간이 남의 신발을 신어보려 노력하는 것. 그렇게 한번 분발하게 하는 원동력. 그것이야 말로 선의, 아니 선의와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

 

애인에 empathy 능력 때문에 종종 다투곤 한다. 나는 갈등상황에서 '나 전달법 (i-message)'를 이용해 바르게 전달하고 해소하고 싶어 한다. 갈등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야기 하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이야기 하면 나도 과한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상대도 잘 공감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상하게 애인과 다툴때는 그게 잘 안됐다. 분명 상황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내 감정표현이 과했다는 것을 수긍한 후 이런 표현에 나는 상처 받았다고 얘기해 잘 전했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상하게 애인은 왜 상처 받았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고 화를 낸다. 더 나아가서 더욱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표현 방식에서 서운하고 속상했던 거라고 딱 짚어 고쳐달라고 얘기해도 내가 못느낀 감정이면 영원히 모르고 이해 안되는 걸로 치부해버린다. 결론은 항상 내가 감정표현이 과했던 것을 사과하면 애인이 받아주는 식이다. 분명 상처받은 건 내쪽인데 말이다..
글을 읽으면서 sympathy의 문제가 아니라 empathy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감정적인 상태는 있지만 지적 작업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글을 읽고 그가 왜 이해를 못하는 것인지 납득 하게 되었다.

 


 

(길을 가다 약에 취한 노숙자가 '니하오, 니하오, 니하오, 니하오.' 하며 말을 거는 장면에서)

"방금 전 일에 대해서는 두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어. 우선 첫번째는 친구와 함께 있으면 내가 동양인으로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야."

"그리고 두 번째로 친구랑 있는 엄마랑 있든 나는 동양인으로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어. 하지만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남자밖에 없고 덩치 좋은 애도 있으니까 무례하게 굴었다가는 한 대 맞을 수도 있지. 그래서 아무도 나한테 차별적인 말을 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실은 세 번째 방향도 있어. '니하오'란 영어로 옮기면 '헬로'잖아? 중국인에게 중국어로 인사를 하면 한결 친숙해 보여서 돈을 주지 않을까? 이런 사업적인 판단 때문에 아까 그 아저씨가 '니하오'라 했을 수도 있어"

...

"하지만 단정하지 말고 이런저런 방향으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대. 시티즌십 에듀케이션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어. 그게 엠퍼시로 향하는 첫발이라고."

 


 

'이러쿵저러쿵해도 결국은 응원해버리는 것'을 미디어에서 쓰는 정치 용어로 바꾼다면 '시민적 내셔널리즘'이라 할 수 있겠다. 민족적 내셔널리즘에 대항하기 위해 쓰이는 용어로 수년 전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를 전후하여 한창 논의되었던 개념이다.

"출신지가 어디든, 피부색이 어떠하든, 무슨 종교를 믿는, 용기를 내어 서로 힘을 합친다면 더욱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믿는 내셔널리즘이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 니컬라 스터전)

 


걱정과 편견은 종이 한 장 차이인데, 마찬가지로 예방과 편견 역시 종이 한 장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가르치지 않으면 아무런 풍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교육은 일부러 풍파를 일으켜서라도 소수의 당사자들을 보호하려 한다. 

...

오랫만에 있는 힘껏 지뢰를 밟아버렸다. 

이 나라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에게는 각양각색의 문화와 사고 방식이 있으며, 각양각색으로 분노를 표현한다. 오랫동안 배워온 사실임에도 자칫하면 지뢰를 터뜨린다.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지뢰를 터뜨렸는지 상상했다. 어쩌면 내가 묻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무례하고 편견으로 찬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것들을 남들보다 더 의식해왔다.
언젠가 SNS에서 그런 글을 읽은적이 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해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그냥 "너의 생각은 그렇구나" 정도로. 비아냥 대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구나 받아들이면 한결 편안하다고 말한다. 
작년 이맘때 술이 한껏 올라 친구에게 시비 걸었던 기억이 있다. 부끄럽지만 그 친구의 표정을 보고 나를 비난하는 거라 생각해버리고 마구 대했다. 그 친구에게는 상처로 남았다고 했다. 이후로 쉽게 연락 주고받기 어려운 사이가 되었다. 눈치를 보고 숨겨놓았던 진심을 잘못된 방식으로 터뜨렸던 것이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도 없다. 다만 그 일이 있고 나서 앞서 나가지 말고 짐작해서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의문이 들면 물어보면 될 일이고 모든 상황을 이해받을 수 없고 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군가 표현하는 방식을 비난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지뢰를 터뜨린다.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다. 다만 표현이 적합하지 않거나 그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사과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빨리 고쳐나간다. 그렇게라도 터진 구멍을 메우려고 애쓴다.

 


아이들에게는 누군가의 사랑은 다수파이고 누군가의 사랑은 소수파라는 감각이 전혀 없다.

'누가' 하든 상관없이 '사랑에 빠지다'라는 대목이 중요한 것이다.

...

아이들은 자신의 가족이 다른 아이의 가족과 달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각각 다른게 당연하고, 다른 것이 좋은지 나쁜지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유아들의 세계란 어쩌면 이토록 컬러풀하고 자유로울까.

중고등학생때 나는 결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일텐데 나따위가 누군가의 세상 전부가 될 자신이 없었다. 한 생명을 책임지고 이끄는 일이 너무 어렵고 부담스러운 데다가 내 자신이 잘 자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생이라고 비관했다.
그 시기를 거쳐 20대 중반이 되었다. 이제는 부모가 될 자격은 따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오히려 아이가 성인이 된 부모를 채워주는 존재도 될 수 있다. 아이들은 무궁무진하다. 틀에 박히지 않는 생각들을 말할 때면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생각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과도 쉽게 용서해주고 편견 없이 받아들여준다. 성인이 된 지금은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때의 부모님, 친구들을 용서하기 어렵기도 하다. 내가 부모가 된다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 대목이다.

 


"인간이란 패거리로 어울려서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하니까." 

내가 말하자 아들은 스파게티를 먹던 손을 멈추고 똑바로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전에는 거의 본 적 없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인간이 타인을 괴롭히길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벌주는 걸 좋아하는 거야."

 


쿨한가, 쿨하지 않은가. 저 아이들 또래에서는 그것이 전부다.

 


"그린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엄마, 내가 예전에 쓴 낙서를 잡지에 연재하는 글의 제목으로 쓴다고 했지?"

"응,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그 말 있잖아. 지금 생각하면 좀 어두운 것 같아"

 

"그때는 앞으로 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을까 불안했고 인종차별 같은 일을 겪어서 좀 기분이 어두웠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

"이제는 블루가 아닌거야?"

"지금은 어떤가 물어보면 ... 그린."

 

"... 그린에 '환경문제'나 '질투'라는 의미가 있지만, '미숙'이나 '경험 부족' 같은 뜻도 있잖아? 내가 지금 그런 상태라고 생각해."

 

옐로에 화이트인 아이가 꼭 블루일 필요는 없다. 굳이 색깔로 말해야 한다면 그린이라는, 인종도 계급도 성적 지향도 관계 없이 아들에게도 팀에게도 다니엘에게도 올리버에게도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도 공통되는 아직 미숙한 10대의 색이 있을 뿐이다.

 

정말이지 아이라는 존재는 멈출 줄을 모른다. 쭉쭉 나아가며 끊임없이 변한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그린 ... 일단 지금은.

 

색깔은 틀림없이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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