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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어쩌구/독후감

<이방인>을 읽고...

by annmunju 2021. 8. 5.

잠시후 그가 자기 방에서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벽을 통해 이상한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가 흐느끼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지만 엄마 생각이 났다. 하지만 나는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도 안먹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엄마를 땅에 묻던 날의 바로 그 햇볕이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어 털어냈다. 한낮으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던 그 해변의 예외적인 침묵을 내 손으로 파괴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꼼짝하지 않는 그 육신을 향해 네 발을 더 쏘았고, 총알은 보이지 않게 몸 속 깊숙이 박혔다. 그건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번의 짧은 노크 같았다.

 

그날 내가 슬픔을 느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많이 놀랐다. 만일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해야 했다면 몹시 난처했을 것 같다. 나는 사실 요즘 내 감정을 체크하는 습관이 사라져 뭐라 말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건 틀림없지만, 솔직히 그건 별 의미가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느 정도 바란 적이 있지 않느냐, 라고도 했다. 여기서 변호사가 내 말을 끊었다. 꽤 놀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본래 육체적 욕구가 종종 감정을 방해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엄마를 땅에 묻던 날, 나는 몹시 피곤하고 자고 싶은 생각뿐이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몰랐으며,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엄마가 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변호사는 내 말에 흡족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런 내가 조금 혐오스러운지 그는 나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판사의 표현에 따르면 내 사건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또 대화가 일반적인 내용일 경우엔 몇 번인가 나를 끼워주기도 했다. 그럼 나는 한숨 돌리곤 했다. 그럴 때는 아무도 내게 심술궂게 굴지 않았다. 모든게 아주 자연스럽고 순조롭고 소박하게 굴러가서 나는 '한 가족이 된 듯한'어처구니 없는 기분마저 들곤 했다. 그래서 예심이 진행된지 열한 달이 지났을 때, 판사가 나를 문쪽으로 데려가면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정한 표정으로 "오늘은 이걸로 끝났소, 안티 기독교 선생!"이라고 말하던 그 흔치 않은 순간들을 무엇보다 좋아했다는 걸 깨닫고 나 자신도 놀랐다. 그 방문을 나오면 나는 다시 교도관의 손에 넘겨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마른 나무 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건 엄마의 생각이었다. 사람은 결국 모든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엄마는 늘 말했다.

 

"그렇습니다. 본 검사는 범죄자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땅에 묻었기 때문에 이 사람을 고발하는 바입니다."

 

그가 엄마에 대한 내 태도를 문제 삼은 건 그때였다. 그는 심리 때 했던 말을 되풀이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내 범죄에 대해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길었다. 어찌나 길던지 난 그날 아침의 열기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재판장이 이상한 표현을 쓰면서 내가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곳, 생명이 꺼져가는 그곳 양로원 주변에서도 저녁은 역시 우수 어린 휴식 같았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 있었으면서도 엄마는 마침내 거기서 해방되어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었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엄마의 죽음을 두고 울 권리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그리고 나 또한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어있음을 느꼈다. 

 

내게 남은 소망은 이제 딱 하나밖에 없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외침으로 나를 맞아주는 것, 그것뿐이다.

 


 

주인공은 감정이라곤 없는 듯 하고 오로지 육체적 감각과 욕구만 따른다. 살인의 동기도 햇빛 때문이라고 말하고, 모든 상황에 있어서 그냥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내가 다양한 상황에서 공감과 이입을 잘 한다고 느껴 왔다. 하지만 도의적으로 지켜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비교적 냉소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왔다. 분명 이방인을 읽을 때 그는 공감가지 않을 법 한 존재였다. 어떻게 이리도 감정 없이 살 수 있을지, 다른 사람과 섞이지 않는 기름처럼 둥둥 떠 있는 이방인. 제목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공감되고 이입된다. 그가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에 총을 쏴버린 그 말도 안되는 상황도 몰입이 된다. 신을 믿지 않고, 어머니가 죽어도 피곤함을 느낀다는 것.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어느 순간 나도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열심히 유행을 좇다가도 금새 냉소적이게 변하고, 남들 다 하는 건 안하고 남들 안하는건 하려고 할 때. 공감을 바라고 말하는 타인의 말에, 그래도 어쩌겠어 받아들여야지 하고 답해버릴 때. 의식하진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비슷한 방향성을 추구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나대로 나만의 길을 가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은 없다. 무조건도 없다. 이 책이 대단하게 내 생각을 바꿔놓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이방인으로 존재하던 그가 이해되고 나도 언젠가 이방인이었던 적, 아니 지금도 여전히 이방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그가 백만번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는 육체적 불편함을 겪고 일반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인거고, 그에 대한 대가는 응당 치러져야 한다. 다만 검사는 어머니의 죽음까지 끌고 와 그를 천륜을 저버린 자식 취급 하고 신을 믿지 않는 다는 것에 혐오한다. 이런 악의적 프레임이 결국 주인공을 죽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검사도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반대로,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불편함으로 주인공을 사형으로 몰았다. 그럼 그도 살인자나 다를바 없지 않는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실질적 사형제도가 없어진 이유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옳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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