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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어쩌구/독후감

여기에 없도록 하자 (2018)

by annmunju 2024. 3. 14.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왜 소설을 잘 읽지 않으려 했는지 기억이 났다. 나는 꽤 몰입을 잘 하는 편이라서 이렇게 무거운 내용의 글을 읽으면 현생이 힘들곤 했다. 게다가 이 책에서는 어쩌면 황당한 설정도 하나 끼어져 있으니 이것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빠르게 읽어나갔다.

여기서 말하는 "햄"은 노동하지 않는 삶을 비유한 것인지 진짜 햄을 말하는지 헷갈렸지만, 근근히 보여지는 묘사속에 나는 스팸을 상상하며 읽게 되었다. 육질이 있던 고기, 그마저도 이것 저것 섞여있는 덩어리에서 잘려지고 다져지고 비벼져서 삶아진 그런 통조림 햄. 참 황당한 설정인 것 같고 묘하게 기분 나쁜 묘사였다. 그럼에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는 과연 햄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고기가 아니라 이것저것 섞여서 만들어진 내가 아닌 무언가.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 내가 아니라, 사회적인 가면을 쓴 깎이고 깎인 이런 나도 햄 아닌가 싶기도 했다. 

 

" 일을 한다는 건 말이죠. 일을 한다는 건 그렇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이 되는거죠. 어디에서 무엇이 되지 않고 일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나로서 무언가 하는 것은 일이 아니죠. 그것은 생활이지 노동의 영역은 아닙니다. 노통은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움직이고 그러한 수고로써 대가를 받는 컷입니다. 내가 온전히 나이지 않고, 나일 수 없고, 나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니 일을 한다는건 고달픈 겁니다. " (198p)

꽤 자주, 내가 아는 어른들은 일하고 있는 나를 보며 잘 컸다고 칭찬했을 때가 있다. 아르바이트에서 상처받아 남몰래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도, 몰입해서 한 일에 좌절했을 때 번아웃이 왔을 때도 나를 칭찬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을 하지 못하는 나는 무가치한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책에서 말하는 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어딘가 속해있지 않고 쓰여지지 않는 내가 될까봐 무서웠다. 그럴수록 나는 진짜 나를 찾지 못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버텨가는데에 그 수고를 다했다.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상황들을 반복하는 것 같다. 내가 온전히 나이지 않고, 나일 수 없고, 나여서는 안 되는 상황들을 마주해야하는 것 같다. 적당히 타협하고 순응하면서 나의 본질과 거리를 두는 것. 예전 나는 꿋꿋하게 내가 생각하는 바른 길을 말하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사람이라면, 많은 일로 닳아 버린 지금에서는 그냥 무엇이 되어 대가를 받는 고달픈 삶을 연명하고 있다.

 

"그런게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가 차마 결별할 수 없는 과거를 공유하게 되면, 어울려 지내는 인간과 인간사이에는 어떤 접점 같은게 생겨난다. 어디로 어떻게 이동해도 나와 상대의 지점에 이르고야 마는, 어쨌거나 꼭 그것을 지나쳐 가야만하는 접합 지점 같은 것." (169p)

이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보아도 결국 나는 살아가야 한다. 따로 남겨진 것 같은 삶이지만 '약'이 '추'를 알아봤듯이, 약하게나마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길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안개속에서 나가고 싶지만, 내일도 비슷하겠지만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였다. 마치 나도 소설 주인공과 어떤 접점같은게 생겨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우리,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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